무릇 사람이란 낭비하지 않고 절약을 실천한다면 칭송받을 만하다. 지도자 위치에 있는 자는 구성원보다 풍부한 재물을 소유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다만 그것이 지도자 자신에게만 한정되어야지 타인에게 적용된다면 이는 검소함을 넘어서 인색함이 되기 쉽다.(62쪽)
혼란의 시대에는 황태자로 지명되는 것조차 불운한 일이었다. 황제란 때때로 자신이 여태껏 고집한 원칙을 무너뜨리는 결단도 필요한 법이지만, 갈바 황제는 오토와 피소를 신중히 저울질하지 못했고, 그것은 자신과 황태자의 비극이 되어 되돌아왔다.(71쪽)
크리스피누스는 카피토의 피를 자신의 칼에 묻히기 전에 책임 소재가 정의롭게 결정될 수 있는지 미리 살펴야 마땅했다. 이렇듯 인간사에서 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대단한 지혜와 분별력이 요구된다.(93쪽)
무키아누스는 승리의 단맛은 적에 대한 승리보다 내부의 승리가 더욱 달콤하다는 파렴치하면서도 은밀한 비밀을 깨닫고 있었다.(117쪽)
인간이란 도움을 받은 것에 보은하기보다 해 입은 데에 보복하는 쪽으로 쉽사리 기울어진다. 그것은 보은을 짐스럽게 여기는 반면, 보복에는 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37쪽)
현실을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인 정신과 사리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드물다. 많은 사람의 가슴에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비합리적인 감성이기 때문이다.(169쪽)
원로원 의원들이란 그들이 가진 권한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행사하려고 시도하기 마 련이고, 이는 타협할 줄 모르는 원칙론자인 황제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러한 이유로 원로원 의원들은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잽싸게 기록 말살형에 처했고, 자신들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가 다음 황제로 지명되기를 갈망했다.(183쪽)
로마법에 의하면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더라도 그 명령이 명백한 위법일 경우에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는 요즘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는 자가 위법한 명령을 거부하자니 지금 당장 상관의 위협에 시달릴 것이 분명하다. 요컨대 이런 갈등에 있는 자가 불행한 것은 법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193쪽)
신분이 낮은 자는 그 어떤 명분일지라도 그들이 얻어 낸 결과에 대해 냉소적이며 때에 따라서는 가혹한 판단을 받기 마련이다. 만약 그자가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면 더욱 참혹한 처분을 당했고, 설령 칭송받을 만큼 대단하고 어려운 일을 해냈더라도 민심이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207쪽)
마르쿠스가 황제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친아들 콤모두스에게 제위를 넘긴 것은 스토아 철학자로서 분별력 없는 선택이라고 비난되곤 한다. 하지만 양아들에게 제위를 넘긴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가 마르쿠스보다 욕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제위를 넘길 아들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성군의 자질이 있는 후계자에게 제위를 넘기기 위해 양아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결론을 보고 시작의 선악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양아들에 의한 제위 계승도 동일한 잣대로 판단해야 하는 법이다.(223쪽)
세네카는 말하기를 “여행자가 대화하거나 독서하거나 무엇을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어느새 목적지에 닿은 것을 깨닫듯이, 인생의 황혼이 덮칠 때 마음은 여전히 소년이지만 준비도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아무런 대비 없이 갑자기 노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니 인생이란 이처럼 짧은 것이다.” 하며 한탄했다.(234쪽)
비열한 무리는 공공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개인의 이득을 챙기고, 공평무사한 법보다는 폭군의 총애를 더 좋아하는 법이다.(313쪽)
상존하는 반란의 위험 속에서 카라칼라가 보호받지 못한 것은 그가 아버지의 잔인성은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친구와 주변의 우호적인 사람에게 용서를 베푸는 법은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잔혹하고 난폭한 군주라도 자신의 목숨을 지켜 주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은밀한 진실을 카라칼라는 무시했던 것이다.(332쪽)
잘못을 용서받은 자가 왜 용서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하자, 관용이란 덕성은 도리어 해악을 가져와 참혹하게 마무리되었다. 오다이나투스도 아우렐리아누스도 마이오니우스도 팔미라 시민도 이러한 점에서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오다이나투스와 아우렐리아누스는 관용을 베푸는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했고, 마이오니우스와 팔미라 시민들은 왜 용서를 받았는지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3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