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이원론적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의 현재적 존재는 감옥과 같고, 감각 세계는 환영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환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영혼은 이데아(Idea)의 세계로 비약해야 한다. 이데아만이 실재성을 가지며, 소멸하는 세계와 달리 끊임없이 존재하는 불멸의 실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이데아의 현상일 뿐이다. 헬라 철학에서 몸은 영혼의 감옥이며, 물질로 구성된 몸은 악한 것이고 영혼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적 이원론 중심의 구원론에는 치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에서 치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치유가 어둠의 나라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표징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여기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경험할 뿐이며 여전히 온전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어둠의 권세 아래 속박되어 있던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삼으셨다. 십자가는 우리를 마귀의 권세와 어둠의 나라에서 해방시킨다. (67-68쪽)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매일 집에서 모여 밥을 먹었다. 모두가 한 상에서 같은 음식을 먹었다. 부자이든 가난한 자든, 상전이든 종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두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음식을 먹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식탁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 주었다. 교회는 ‘종말론적 식탁 공동체’이다. 그들은 식탁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전도이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목회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그 스스로가 존재 목적을 갖지 않는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나님 나라 목회를 할 수 있다. 만일 누가 나에게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 통치 영역’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정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영역이 물리적으로 한정되고 고정된 개념은 아니다. (178-179쪽)
구약은 옛 창조의 이야기이고 신약은 새 창조의 이야기이다. 성경의 네러티브는 창조로 시작하여 새 창조로 끝난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예배를 드리게 되면 새 창조를 열망하게 되고, 그 열망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의와 사랑과 희락을 실현하게 한다.
구약의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우리는 여기서 공적 신앙의 기초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이웃은 모든 인류를 의미하고 나아가 지구상에서 우리와 공존하는 모든 생명체까지 포함한다. 바울의 신학도 신앙의 개인성과 공공성을 균형 있게 강조한다. (229쪽)
복음의 사사화를 극복하고 복음의 공공성을 회복해야 한다. 영혼 구원만 말하지 말고 전인 구원과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말해야 한다. 교인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한국 교회가 교회 중심주의에서 탈피하고 이원론 복음을 극복해야만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 집단’이라는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이며, 나아가 지역사회로부터 칭송받는 교회가 될 것이다. (2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