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계 활동을 하는 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실업자였다. 이승만 치하에서 통일운동을 했거나 진보당에 속했던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대부분 감옥에 끌려갔던 경험이 있었다. 즉 전과자였던 것이다. 취직할 수 없었다. 젊디젊은 지식인 청년들이 백수 신세였다. 사정이 묘했다. 혁신계 인사들은 대부분 유학을 하거나 고등교육을 받을 정도로 부모 대대로 자산가 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부모의 지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활동비 쓰고 나면 호구지책이 문제인 형편이었다.
반면, 전창일의 경우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지만, 안정적인 월급을 받고 있는 중견 사원이었다. 혁신계 인사들과 어울릴 때 커피, 술값, 밥값은 대부분 전창일의 몫이었다. 그렇게 그 세계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19쪽)
1961년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나 단체는 없었다. 공산당과 남로당 등은 미군정 시기 불법단체로 지정되어 이미 소멸되었다. 4월 혁명 후 사회당, 사대당, 혁신당, 통사당 등 사민주의를 주장한 정당이 나타났으나 사회주의 정강·정책보다는 통일 문제에 보다 큰 비중을 두었고, 더욱이 통사당은 반공통일정책을 주장했던 단체였다. 결국, 박정희 군부의 반공정책은 혁신계 정당·단체를 소멸시키면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였다.
쿠데타군의 혁신계 소멸 움직임은 쿠데타 사흘째인 5월 18일부터 시작되었다. 「민족일보」에 대한 탄압이 신호탄이었다. 사장 조용수를 비롯해 8명의 간부들이 18일 자로 구속되었고, 「민족일보」는 19일 자로 폐간되었다. 그 후 모든 언론은 군에 의한 사전검열로 통제되었고 수많은 신문이 폐간당했다. 아울러 정당 활동, 집회 등 정치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고,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1년 7개월 동안 지속되었다.(111쪽)
3·24, 6·3항쟁 배후 및 관련자에 대한 검거 열풍이 대학가를 강타했다. 심재택 역시 검거 대상이었다. 그는 5·16쿠데타 무렵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사건’ 건으로 단기 5년 장기 7년의 형으로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1962년 4월 19일 형 면제로 출옥한 바 있다. ‘2대 악법 반대투쟁’ 당시 민통련 간부로서 민자통을 드나들다가 전창일과 연을 맺은 사이다. 심재택의 도피를 도와주기로 했다. 전창일의 도피처였던 평택공사는 이미 끝났다. 마침 춘천 미군 부대 안에 공사장이 있었다. 심재택은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은거하다가 수배가 풀린 후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피 중이던 도예종·김정강에게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44쪽)
전창일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끌려간 곳은 남산 중턱에 있는 중앙정보부 신축 건물이었다. 긴 테이블과 몇 개의 의자만 놓여있는 빈방에 앉혀놓았다. 전창일은 취기에 테이블에 엎드려 있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친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잠자!” 하며 불러내더니 다시 차에 태워 광화문 쪽으로 질주했다.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가 보면 안다.”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대답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도착한 곳은 서대문구치소였다. 전창일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구치소 독방에 수감되었다. 밤 11시경이었다.
오랫동안 창고로 사용되었던 그 방에는 고양이 정도로 크게 보이는 쥐가 왔다 갔다 했다. 쳐다보는 동그란 눈은 갇혀있는 죄수를 불쌍히 여기는 애련의 눈빛 같기도 하였다. 가끔 들리는 간수의 구둣발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곤 한다. 전창일은 오한을 느꼈다. 취기가 가시면서 한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오월의 감방은 추위를 느낄 정도로 온도가 낮았다. 침구란 게 솜이 제멋대로 뭉개어진 이불 하나뿐이었다.(204쪽)
죽지 않고 살아남은 전창일은 향후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다. 답은 이미 정해졌다. 통일운동에의 참가 그리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추모행사는 살아남은 자의 몫이었다. 그 무렵까지 추모제를 못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세상이었다. 전창일은 추모제를 제안했다. 1985년 10주년 기념으로, 10주기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대부분이 동의했다. 그러나 장소를 얻을 수 없었다. 4월 9일은 모두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한다. 문익환 목사가 도움을 주었다. 그가 근무하는 한빛교회(강북구 미아9동)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기로 했다. 당시 집안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모금을 했다. 재물을 만들고 떡집에 식사와 떡 등을 맡겼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364쪽)
그런데 혐의가 이상했다. 검찰에 송치된 범민련 성원 중 전창일과 김병권 두 사람에겐 간첩혐의가 적용된 것이다. 안기부는 “이들 가운데 전 씨와 김 씨는 재일 북한 공작원 박용(47·조총련 중앙본부 정치국 부장)에게 포섭돼 국내동향을 보고하는 등 간첩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나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송치했다”고 밝혔다. 며칠 전, 안기부의 만행을 저지하기 위해 준항고를 신청해 승소했던 전창일이 간첩으로 지목되었는데도 언론은 조용했다. 누가 보더라도 준항고 신청에 대한 괘씸죄로 보일만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기자와 언론사들은 ‘전창일 간첩설’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가족들이 나섰다.(599쪽~6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