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은 고려로 넘어오면서 미인을 상징하고 부귀영화를 염원하는 꽃으로 상류 사회를 중심으로 더욱 사랑받으며 다양한 품종으로 개발되었습니다. 기록으로 볼 때 고려인들은 특히 꽃이 화려한 모란, 작약, 연 등을 즐겨 심었는데, 이 중 궁궐 화원에 심긴 대표적 화훼류를 꼽으라면 단연 모란일 것입니다.
고려 임금들의 모란 애호 또한 중국에 뒤지지 않아서, 예종(재위1105~1122)은 모란을 아껴 늘 신하들과 함께 이 꽃을 읊었습니다. 이규보는 모란을 무척 사랑하여 그의 문집에는 모란에 관한 시가 매우 많아 ‘모란시인’이라 부를 정도입니다. (p.18~19)
오색팔중산춘(五色八重散椿)이란 특이한 동백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한 그루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고, 꽃잎은 여덟 겹이며, 다른 동백처럼 꽃송이째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잎씩 떨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 동백은 원래 울산의 학성(鶴城)이란 곳에 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가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바친 것입니다. 줄곧 지장원(地藏院)이란 절에 있다가, 그 후손이 되는 나무가 1992년 우리나라로 돌아와 울산시청 앞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p.43)
매화를 남달리 사랑한 인물로 중국에 임포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퇴계 이황(1501~1570)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이황은 매화에 대한 시 107 수를 지었는데, 이중 91수를 모은 것이 『매화시첩(梅花詩帖)』입니다.
이황은 매화의 고고한 성품을 늘 곁에서 보고자 평생 매화분(梅花盆)을 가까이하며 정성을 쏟았고, 평소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梅寒不賣香(매화는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이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아 평생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생을 마감하는 유언으로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애정이 남달랐다고 전합니다. (p.52~53)
목근이란 이름은 김소운(金素雲)이 쓴 서간체 수필인 『목근통신(木槿通信, 1951)』으로도 유명합니다. ‘일본에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 수필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에 대해 느낀 바를 진솔하게 적은 글로, 일본의 『중앙공론(中央公論)』에도 번역되어 실리면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궁화가 나라꽃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1900년경 애국가 가사가 만들어질 때 후렴으로“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들어가면서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무궁화가 선택되었습니다. (pp.72~73)
앵두는 나무 열매 중 가장 먼저 익어 고려부터 조선 초까지 제사에 올릴 만큼 귀한 열매였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들도 앵두를 즐겼는데, 세종(재위1418~1450)은 세자 문종이 따 온 앵두를 맛보고 세자의 효심에 크게 탄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국조보감』 제8권 문종조에 보면 문종은 항상 후원에다 앵두나무를 심고 손수 가꾸어 잘 익으면 따다가 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에 세종이 반드시 맛을 보고서 말하기를, “외방에서 올리는 것이 어찌 세자가 직접 심은 것만 하겠는가.” 하셨다 합니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문종실록』을 비롯해 여러 기록에 등장합니다. (pp.262~263)
신라 말 도선(道詵, 827~898)은 『도선비기(道詵秘記)』에서 “5백 년 뒤 오얏, 즉 이씨 성을 가진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이 적중하지 못하도록 고려 중엽 이후에는 한양에 자두나무를 심었다가 벌리사(伐李使)를 보내 베어 내 왕기(王氣)를 다스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씨 성을 가진 이성계가 조선을 세워 도선의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두나무는 조선 왕조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나무입니다. 종묘제례악인 『정대업(定大業)』에도 “삼천 개의 열매 맺은 오얏이 번창하네. 오얏이 번창하니 즐거움이 끝이 없네”라는 가사가 등장합니다. 이는 오얏의 번창이 곧 이씨의 번창이라는 것입니다. (pp.270~2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