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덤 너머의 회상록>>의 (639-641p.)
나는 이 <회상록>을 1811년 10월 4일 발레-오-루에서 쓰기 시작했는데, 1841년 9월 25일 파리에서 그것들을 추고하고 또 수정하기를 끝마쳤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공개하게 될 이 책을 쓰면서, 내 생애의 온갖 변혁과 변천 가운데서 남몰래 펜을 잡고 있었던 지가 29년 11개월 21일이 된 셈이다.
내 죽음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내 죽음에게 운명이 맡겨진 이 작품은 내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을 것인가? 나의 저술에는 흠이 있을 수도 있고, 이 <회상록>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 이야기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말년의 지루함을 달래주기에는 쓸모가 있으리라. 생애의 마지막은 뼈저린 시기이다. 아무 것에도 걸맞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즐겁지 않다.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고, 모두에게 짐이 되며, 마지막 안식처에 가까이 있으니 한 발자국만 가면 그곳이다.
인적이 없는 바닷가 모래밭을 꿈꾸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앞날에 그 어떤 상냥한 망령들이라도 알아보게 될 것인가? 지금 내 머리 위로 흘러가는 것은 구름이구나!
나에게 한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어지럽다. 밤을 지새워 만든 내 작품이 순수한지 내 양심이 편안하지 않고, 저질러진 자신의 잘못에 대한 인간의 무분별한 고집과 자기만족이 두려운 것이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충분히 정의에 의한 것인가? 도덕과 자비가 엄격하게 지켜졌는가?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할 권한이 있는가? 만일 이 <회상록>이 어떤 나쁜 일을 일으킨다면, 나의 참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땅위에서 남모르게 숨겨진 채로, 하느님 제단을 기쁘게 하는 당신들의 생애로서 기적을 만드는 여러분들, 당신들의 비밀스런 덕행에 인사를 올린다!
여러분은 내가 태어나는 것, 나의 어린 시절, 콩부르 성에서 내가 만들어낸 기이한 감정에의 몰입, 베르사유 궁전에서의 알현, 그리고 파리에서 대혁명의 첫 현장에 내가 있었던 것을 보았다. 신세계에서는 워싱턴을 만난 후에 숲속으로 깊이 들어갔었으나, 난파선이 나를 브르타뉴로 다시 데려왔다. 나에게는 병사로서의 고통과 망명자로서의 비참함이 있었고, 프랑스에 돌아와서는 <<그리스도교의 정수>>의 저자가 되었다. 변화된 사회에서 친구들을 얻었고 또 잃었다. 보나파르트는 나를 멈추게 하고, 피가 흐르는 앙기앙 공작의 시체를 가지고 내 앞길로 뛰어들었으며, 나는 멈추어서 그 위대한 사람을 코르시카의 요람에서 세인트헬레나에 있는 묘지까지 소개하였다. 그리고 나는 왕정복고에 참여해서 그것이 끝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마치 두 개의 강이 합류하는 곳처럼 두 세기 사이에 있었다. 내가 태어난 옛 강가에서 섭섭한 마음으로 멀어져가면서, 또 알지 못하는 강가를 향하여 희망을 갖고 헤엄치면서 나는 그 혼탁한 물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어가는 티끌 위에서 참으로 왜소하구나! 그러나 지성으로서 그는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인간은 별들의 모습이 언제 사라지고, 한순간만 보였던 혜성이 수천 년 후 어느 때에 되돌아오는지를 알고 있다! 천체들은 하늘의 옷자락 안에서, 눈에 안 띠는 미세한 벌레의 발걸음 하나조차도 우주 속에 감출 수 없다. 우리들에게 새로운 별들은 어떤 운명을 일깨워주는가? 그 별들이 나타나는 것은 인류의 어떤 새로운 진행과정과 연관이 있는 것인가? 앞으로 태어날 당신들은 그것을 알 것인가?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물러간다.
1841년 11월 16일, 이 마지막 말들을 쓰는 동안 외방선교회의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문이 서쪽으로 열려있다. 아침 6시이다. 창백하고 커다란 달이 동녘의 황금색 여명으로 간신히 보이는 앵발리드의 첨탑으로 기울고 있다. 사람들은 옛 세상은 끝나고, 새 세상이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나는 해 뜨는 것을 다시는 보지 못할 새벽빛의 반영을 보고 있다. 내게는 무덤가에 앉아있는 일만 남았으며, 그 다음에는 손에 십자가를 들고 주저하지 않고 영원 속으로 내려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