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3년과 1984년에 영등포여자고등학교의 일반 학급(주간 학급) 학생들을 가르친 뒤, 같은 학교 울타리 안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1985년 3월 1일부터 1987년 2월 28일까지 2년간 야간 특별학급 학생들을 가르쳤다. 내가 지난날 가난한 환경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서, 학교장에게 야간 특별학급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자진하여 희망하였던 것이다. 내가 임용시험을 거쳐 문교부(교육부) 연구사(국어과 편수관)로 임용되기 직전까지 그들을 가르쳤던 것이다.(7쪽)
나는 모든 학생들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즉시 나의 집으로 전화를 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들이 밤공부를 마치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그들이 잠들기 전 피곤한 몸으로 오죽이나 고향을 그리워할까를 생각하면서, 제발 포근한 잠 속에서나마 미소 짓는 어머니와 개구쟁이 동생들을 만나기를 바랐다.
어떤 사정으로 결석한 학생의 교실 의자가 텅 비어 있을 때면, 그 책상에 비치는 형광등 빛이 유난히도 궁금하고 쓸쓸해서, 나는 스산한 마음으로 그 책상을 쓰다듬었다. 그때의 그 감촉은 오래도록 내 손바닥에 생생히 남아 있곤 했다.(26~37쪽)
대우어패럴 사태는 학생들이 소속했던 회사도 이들을 외면하고, 파업을 주도했던 노동조합도 이들에게 아무것도 챙겨 주지 못하는 상황을 낳았다.
가련한 135명의 여학생들을 돌보아 주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거리로 쫓겨난 신세나 다름없었다. 이들은 한 끼의 식사 해결을 위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기숙사 생활을 했던 많은 학생들은 하룻밤 잠잘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기웃거려야 했다. 이들에게는 어찌 세상이 슬프고 외롭고 두렵지 않겠는가.(53쪽)
나는 염보현 서울특별시장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 긴 편지에는, “시장님은 뜻하지 않게 퇴직된 근로 청소년 학생들에게 이미 지갑만이 아닌 마음까지도 열어 주셨습니다. 시장님은 국가와 사회의 큰 과제인 ‘화합’의 실천에 좋은 사례를 보여 주셨습니다.”라는 고마움의 인사말과 학생들의 어려운 사정을 자세히 담았다.
“학생들이 시장님의 따뜻한 배려를 간직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기어이 이겨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그들도 먼 장래에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아야겠다는 확신을 지닐 수 있도록 그들이 안정적인 일자리와 잠자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 장학금을 지원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내용을 적었다.(69~70쪽)
학생들로서는 특별학급이 개설된 지 8년 만에 처음 갖는 종합 축제 형식의 행사이었으므로 기대가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연습 시간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정규 수업에 빠지면서 연습에 열중해 보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학생들은 정규 수업이 끝난 밤늦은 시간과 일요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한 학생이라도 연습에 참여하지 못할 경우가 생기면 서로가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연습 도중이나 연습을 마친 뒤에 수고했다며 나의 돈으로 빵과 과자와 음료수를 사다 주곤 했는데, 그들은 맛있게 먹으며 힘과 용기를 내었다. (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