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름 (28-31쪽)
살며시 부르면 / 눈물이 날 것 같은 이름이 / 꿈길에서 걸어옵니다 // 다시 부르면 /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이름이 / 햇살 속에 반짝입니다 // 울음 끝에 웃음이 되고 / 웃음 끝에 연둣빛으로 물들게 하는 / 보고(寶庫) 속에 넣어 둔 이름 // 홀씨처럼 날아와 / 어느 날은 노래가 되고 / 또 어떤 하루는 봄 길이 되어 주는 /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이름 …
떠올리면 별이 되고 생각하면 아침이 되는 이름, 부르면 행복해지는 이름이 있어 우리의 하루는 눈부시게 피어난다. 담벼락의 배롱나무 꽃잎에 이름을 하나하나 새기니 가슴속에 파랑새가 떼 지어 들어온다. … 육신이 파김치처럼 지쳐 있을 때, 삶이 무상해지고 우울할 때면 온몸에 막힌 피돌기를 흐르게 하는 이름이 말이다. 존재로 심장이 먹먹해지는 이름, 그립고 그리워서 명치끝이 아픈 이름, 노을이 내리거나 첫새벽에 눈을 뜰 때면 생의 노래가 되고 시(詩)가 되는 이름 말이다.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 (44-46쪽)
이른 봄날, 파랑새처럼 날아와 / 하얀 밤을 보내야 했던 야윈 영혼에 / 산수유로 가득 채우게 만드는 /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 땡볕이 요동치는 여름이면 / 가끔씩 샛바람으로 파고들어 / 땀에 젖은 몸을 뽀송하게 만들다가 / 잎 넓은 나무가 되어 주는 사람 // … 계절이 가고 오는 길목에 / 비우고 내려놓아야 하는 시간쯤에 / 아쉬움보다 설렘이 많은 것은 / 당신의 존재 때문이에요 …
나에게 사랑은 바닷가 등대이고, 낡은 담벼락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고, 매일 마시는 한 잔의 커피이고, 오지 마을의 서점과 같다. 여전히 설렘을 주고 여전히 따뜻하고 여전히 깨어 있는 삶을 만들게 한다. 사랑은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며 위로인지 모른다.
가을 그리움 (194-197쪽)
새털구름이 하늘을 덧칠하고 / 하늬바람은 낙엽으로 허공을 휘돌 때 / 꼭두서니빛 설렘이 찾아와 / 가슴속에서 종일 달그락거린다 // … 너를 쓰면서 나를 지우고 / 나를 쓰면서 너를 지우기를 반복하며 / 노자의 철학을 곱씹고 안주 삼아 / 한 잔의 술과 동침했던 푸른 밤 // 너는 꿈일 때 삶은 현실이다 /너는 현실일 때 나는 또 꿈꾸고 있다 / 산다는 건 어쩌면, 꿈과 현실 사이 / 만남과 이별 사이에 박힌 대못임을 …
사랑 그 이후에 남은 그리움은 삶을 더 멋지게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하고, 한 사람의 일생을 풍화시키기도 한다. 사랑했던 추억을 먹으며 그리움 하나로 평생을 보낸 천재 시인 백석의 연인 김영한(자야)도, 청마 유치환이 그토록 사모했던 연인 이영도 또한 그랬다. 다만 사람에 따라 사랑의 깊이에 따라 그리움을 다스리는 방법과 시간과 온도 차가 다를 뿐이다.
나에게 그리움은 욕망의 줄기를 잘라야 하는 매스이기도 했지만, 마음을 정제하는 청수이기도 했다.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고통보다는 기다림의 미학과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했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너를 쓰면서 나를 지우고, 나를 쓰면서 너를 지우기를 반복하고 꿈을 꾸고 시(詩)와 연애하며 보낸 하 세월, 어쩌면 그리움은 내 생의 또 다른 연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