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땅에 울타리를 두르고 채소와 향신료로 쓰 는 식물, 꽃과 나무들을 심어 왔습니다. 중세 시대에 재배 식물을 기른 특별한 장소는 수도원의 정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양귀 비, 파슬리, 멜리사, 딜, 러비지, 아니스, 세이보리, 회향, 전호 같은 지중해산 향신료 식물과 약초를 재배했습니다. 수도원에서는 향신료 식물을 이용해 음식 맛을 세련되게 만들고, 치유 효과가 있는 약초는 약재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 정원은 늘 ‘살아 있는 약국’이라 불렸습니다.
텃밭은 산업화 이전 주거에서 흔하게 조성되었으나, 근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17~18세기에 유럽에서는 왕의 궁전과 별장, 귀족의 대저택 주변에 관상 과 경관을 위해 채소, 과수, 화훼, 약용작물, 허브 등을 심은 실용 정원이 발달했습니다. 세계대전 때 유럽과 미국에서는 ‘빅토리가든(victory garden)’을 조성하고 채소를 심어 식량의 자급자족을 도모했습니다. (19쪽)
〈수련〉 연작으로 유명한 모네의 정원은 그에게 개인적인 안식처이자 예술과 삶이 만나는 현장이었습니다. 또한 가족의 밥상을 책임지는 채소밭이요, 닭과 오리를 키우는 마당이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식탁에 반드시 채소가 올라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채소 재배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채소들을 식용 부위에 따라 뿌리채소, 잎채소, 구근 채소, 씨 채소로 분류하고 따로따로 키우게 했습니다. 온실 프레임의 배치, 멜론 파종을 위해 피라미드 형태로 배열한 화분들, 묘목 보호용 덮개, 돼지감자를 위한 참호 모양 구덩이, 모네가 굉장히 좋아하던 적양배추 등의 채소를 보존하려고 파 놓은 구덩이 등 모든 것이 모네의 구상에 따라 완벽한 질서를 이루었습니다. (35-36쪽)
고려 시대엔 어떤 채소가 있었을까요? 고려 무인정권 시대의 문인인 이규보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 참외, 순채, 토란 등 여러 종류의 채소 이름이 보입니다. 이 채소들은 간식이나 반찬으로 먹은 듯합니다.
한복판을 가르면 물 뜨는 바가지요
속만 파내면 술 담는 표주박
너무 크면 무거워 떨어질까 근심인데
애동이로 있을 때 쪄 먹어도 좋으리
_이규보, 「가포육영(家圃六詠)」 중 ‘박’ (72쪽)
마당을 절반 떼어 배추(菘)를 심었는데
벌레가 갉아 먹어 구멍이 숭숭 났네
어찌하면 훈련대 (訓鍊臺) 앞 가꾸는 법 배워다가
파초 같은 배추잎을 볼 수가 있을까
_「장기농가」 중 ‘배추’
평소 원포 경영의 꿈을 지녔던 다산은, 첫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에서 배추를 키웠습니다. 초보 농부라 그런지 심은 배추를 벌레가 갉아 먹어 구멍이 숭숭 난 그물 배추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훈련원 밭의 배추가 가장 좋다고 주를 달았습니다. (159쪽)
가지는 파종에서 본잎이 6~7장이 되어 정식할 때까지 2개월 이상 걸리므로, 텃밭에서 몇 그루를 재배할 때는 시장에서 모종을 구입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모종은 잎 의 색이 진하고, 꽃이 붙어 있으며, 마디 사이가 짧고 줄기가 튼튼한 것을 고릅니다.
박세당이 쓴 『색경』에는 “가지의 성질은 물기와 잘 어울리니 항상 물기가 촉촉하게 배도록 한다. 4~5개의 잎이 나게 되면 비 올 때에 진흙을 붙여 옮겨 심는다. 만약 날이 가물어 비가 내리지 않 면 물을 대어 촉촉이 스며들도록 하고 밤에 심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곁순이 나오면 첫 번째 꽃의 아래와 위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잘라 내 세 줄기로 키웁니다. 가지는 거름을 많이 필요로 하고 물 도 좋아합니다. 6월 들어 열매가 열리기 시작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일찍 따 주어 나무의 세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합니다.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