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봄비가 촉촉이 내린다. 옅게 젖은 회색도심의 자취로 미뤄 아마 대략 한 시간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것 같다. 방문을 열고 미명이 채 가시지 않은 바깥을 흘끔 내다본 우성한은, 쓰디쓴 인상을 지어내면서 양어깨에 걸쳐 멨던 멜빵가방을 풀어 장판바닥에 툭 떨어트린다. 밀려든 허탈감에 따른 체념이다. 말 그대로 혈압에 눌리는-혈액의 압력에 심장이 수축하면서 끙끙 앓는 박탈감이었다.
“제기랄! 글러 먹은 하루군.” (12 쪽)
지금의 나의 운신은 아주 소량의 흙가루 속에 묻힌 한 줄기 식물에 불과하다. 한 바가지 물에도 금세 씻기며 사라질 수 있는 눈곱만큼의 흙을 딛고-담벼락 시멘트 틈새 사이를 겨우 비집고 싹을 띄운-더는 자라지 않아 항상 난장이에 머물러 있어 이름 소개도 무의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온종일 햇살이 비추는 양지바른 길녘이라 오가는 불특정 인적은 잦으나, 누구도 돌아보지 않아 가엾기 그지없는-가녀린 한 떨기 들풀에 지나지 않다. 그들이 털어내는 옷의 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쓰는 빈 줄기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만은 한 터럭도 없다. 그 입장이 못돼서가 아니라, 고민한들 행운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포기를 오래전부터 터득해 뒀기 때문이다. (87 쪽)
다리 아래 살인사건을 총지휘 맡게 된 지역 경찰서장은 강력 범죄를 수없이 다뤄본 훌륭한 베테랑이다. 경찰은 흉기에 무차별 난자당한 망자의 신원부터 탐문을 시작했다. 현장에서는 사망자의 신원을 딱 짚어 확인해 줄 물증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깨가방 안에 들어있는 빵과 우유가 전부였다. 그것도 이미 썩은 상태라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그 외에 노란 수건 한 장과, 치약·칫솔이 함께 담아진 직사각형 플라스틱 갑이 더 있었다. 수거한 칫솔과 아직은 윤곽이 남아 다행인 손가락 지문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했다. 신원이 확인되었다. 주소는 사망자의 자취방이었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치매 요양원에 장기입원 중인 아버지의 소재도 찾아냈다. 근무지도 알아냈다. (287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