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유치장에 있던 영업부장 선배에게 책 때문에 간첩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했다. 그때였다. 한쪽 구석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모로 누워 있던 한 사내가 부스스 몸을 일으켜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이미 공공연한 책인데요, 뭘.” 바로 장편 서사시 「한라산」의 이산하 시인이었다. 그는 당시에 부정기 간행물 『녹두서평』에 「한라산」을 발표해 구속된 상태였다. (11쪽)
어느 날이었다. 나는 서머싯 몸에, 그리고 같은 방의 다른 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몰입해 있었다. 교도관이 물었다. “123번, 무슨 책 봐?” “달과 6펜스요.”
“○○○번, 너는?”
“죄와 벌이요.”
교도관이 한숨을 내쉬고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아휴. 자식아, 진작 좀 읽지 그랬어.” (21쪽)
아편전쟁이 공급자의 전쟁이듯 혁명은 극약 처방 원인 제공자의 참화지만 이 난폭한 물결에 인민도 휩쓸려 죽어 나가는데, 혁명이 얼마든지 거듭되어도 좋다고 말하는 게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의 고비마다 청산하지 못한 구체제의 적폐가 우리 아이들, 미래 세대를 두고두고 괴롭힐 것이 불을 보듯 훤한데 극약 처방만은 피해야 한다는 말만 거듭해야 할 것인가? (27쪽)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가 격돌했던 시대를 이미 지난 세기로 밀어 넣어 버린 지 한참인데도 여전히 ‘자아’는 위태롭다. “최악의 사회주의가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낫다.”고 한 루카치조차 만년의 정치적 실각으로 유폐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카프카도 리얼리스트였다.” 1987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옹호에 사로잡혀 “사회 따위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자아는 지금 행복할까.
당신의 자아는 지금 어떤가? 뒤돌아보지 않고 직진할 수 있겠는가? (40쪽)
지금은 양성평등의 기치 아래 혁파되었지만 실은 남자만이 사람이라는 속뜻을 담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여류(女流)’라는 보수반동적 형용의 먼 상류 어디쯤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던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은 그러나 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전일적 지배 밑에서 도가적 인간 해방의 혁명을 꿈꾸었던 인문(人文) 전사다. (72쪽)
나의 이 일화는 여성의 정신과 육체에 대한 현대의학의 물질적 지배와 공포스러운 통제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보지의 정치(Vaginal Politics)』라는 책에서 엘렌 프랭크포트(Ellen Frankfort)는 산부인과 병원의 정치를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어린아이였고 그는 어른이었다. 나는 발가벗었고 그는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누워 있었고 그는 서 있었다. 나는 침묵했고 그는 명령하고 있었다.’ (150쪽)
벤야민 선생에게 묻지 못한 질문의 답을 나는 랑시에르의 책에서 얻었다.
“발터 벤야민이 상품이라는 환영과 파리의 산책 지형학에 입각하여 보들레르의 상상적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이론에 의존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보들레르의 산책 장소는 파리의 그랑 불르바르보다는 물신주의 이론을 개념화한 발자크, 벤야민에게 직접적으로 영감을 준 루이 아라공의 초현실주의적 몽상에서 떠나지 않았던 발자크의 동굴-상점이 더 맞을 것이다.” (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