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매개로 이어진 사람들에게는 왠지 모르게 경계가 무너지고 마음이 무장 해제된다. 책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왠지 사람의 마음도 귀하게 대할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그런 우연 같은 인연으로 사람을 얻을 때면 어느 때보다 마음이 풍요롭다.
오늘도 자그마한 책방에 머물다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공간의 크기는 작을지 몰라도 그곳에서는 누구의 이야기도 작지 않다. 뛰어난 필력을 가진 이름난 작가만이 주목받는 공간이 아니라, 책과 글을 애틋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곳이 참 어여쁘다. -64쪽
앞으로도 계절의 순환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함께 익어 갈 것이다. 가끔은 뜨거운 햇볕을 만나 고단하고 거친 폭풍에 지쳐 삶이 힘들지도 모른다. 그런 때에도 서로에게 여린 벚꽃처럼 위안을 주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우리가 함께 보낼 사계절에 초록의 싱그러움과 열매의 달콤함이 더 자주 찾아와 주길.
오늘도 우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서로의 기억 속을 사뿐사뿐 걷고 있다. 여전히 반갑다. -82쪽
바다 옆에 서면 이유도 모른 채 솔직해진다. 커다란 바다 앞에서는 욕심이 줄어들고 미움도 작아진다. 힘찬 파도와 씩씩한 바람 앞에서 나약해진 마음도 웅장해진다. 바다는 오래 간직한 꿈을 수없이 다짐하게 만든다. 그리고는 파도와 바람에 실어 무언의 응원을 보내 준다. 걱정은 조금씩 사그라들고 웃음은 되도록 늘어나도록. -120
나에게는 한 발 물러설 곳을 마련해 두는 습관이 있었다. 간절히 바라던 일을 결국은 이루어 내지 못하고 실패했을 때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내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았다. 내 마음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꿈과 현실의 중간 어디쯤 적당히 제 몸을 걸치고 살았다. 그건 스스로를 자책하며 공격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어이자 대비이기도 했다. 그런 자조적인 비겁함은 금방 몸에 익숙해져 버려서 관성의 법칙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마음을 살뜰히 보살펴 주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을 견딜수록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162쪽
글을 쓰는 일은 카세트의 녹음 버튼을 누르는 일과 비슷했다. 과거에 도착해 소중했던 추억을 수집하고, 그동안 잊었던 소중한 기억을 재생시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다시 녹음한다. 지난날을 회상하고 앞날을 상상하며 오늘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황홀한 일이다. -167쪽
시간이 흐르며 연락이 뜸해진 사람들이 있다. 사는 곳이 멀어지기도 하고, 직업이 달라지기도 하고, 관심사도 달라지면서 서로의 삶에서 자연스레 흐릿해졌다. 그때마다 더는 나를 찾지 않는 이들에게서 서운함을 느끼곤 했다. 내가 그들의 삶에서 삭제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헛헛하기도 했다. 그런 섭섭한 마음이 들면서도 괜한 심술이 생겨 먼저 연락을 하지도 못했다.
내 마음도 정리되지 않은 옷장과 비슷한 상태인 건 아닐까. 그동안 지나친 욕심과 복잡한 생각들이 내 마음을 비좁게 만들고 있지는 않았나.
텅 비어 버린 옷장은 오히려 느긋함과 편안함으로 꽉 차 보였다. 표정 없는 옷장이 생글생글 웃는 듯했다. 다시 입지 않을 옷들을 버리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내 옷장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