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그녀는 그만 거울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순간 차가운 젤리가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낯선 차가움이었다.
이 세상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오한이 그녀의 몸을 강타했다. 물에 빠진 듯 온몸이 적셔졌으나, 젖은 것은 아니었다.
매섭게 다가온 초겨울 칼바람처럼 살이 시렸지만, 이곳은 공기로 채워진 게 아니었다. 투명하고 말캉한 반사 물질 사이를 유영하는 듯했지만 이건 물도 공기도 젤리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살기 같기도 하고, 엄마 배 속에 있다가 처음 만나는 이 세상의 냉기 같기도 했다.
그녀는 곧 깨달았다. 이건 거울을 만졌을 때의 온도다. 다만 그 차가움이 전신에 닿았을 뿐이다.
그리고 승언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거울 건너편 세상에 던져졌다. 이곳은 새로운 세계가 아니었다. 그냥, 좌우가 뒤바뀐 현실이었다. (30페이지)
절박한 순간엔 그 어느 것이라도 붙잡고 싶어진다. 그것이 거울을 통해서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승언은 이 현실을 붙잡아야만 했다.
거울 우편과 좌편, 두 개의 차원에서 시간은 평행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흐르는 시간만큼 이곳의 시간도 똑같이 지났다.
그녀는 동시에 흐르는 시간을 거울을 통해 타고 넘어 또 다른 경우의 수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곳 세상에서 그녀는 적어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땐 이 거울의 세상이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실수하지 않은 세상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 볼 기회. (32페이지)
또 내가,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기 보이는 게, 내가 원래 살아 내야 하는 삶이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내가 아이를 잃는 세상. 잡혀가더라도, 내가 잡혀가는 게 맞았다. 사람을 죽인 죗값은 내가 받아야 한다. 다시 오른편의 세상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63페이지)
앞으론 오른편의 세상이 그 어떠한 꼬임으로 날 유혹하더라도, 넘어간 왼편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 이곳으로 넘어오지 않겠다.
그 어떤 선택의 기회도, 이제는 차단하겠다. 그 어떤 운명도, 내가 선택하지 못하게 하겠다.
거울에 손을 대자, 잔잔한 파동이 일면서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것이 승언의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었다. 제언이를 살리고, 우리 아이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선택.
그녀는 계속 평행한 현실로의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똑같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지금, 다른 선택의 순간으로. (7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