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디든 길 위에 선 여행의 의미도 다시 생각했다. 단순하게 내게 채워져 있던 현실의 욕망들을 잠시 비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을까, 이곳에 오면서 기차 안에서 읽었던 내용을 다시 되뇌었다. 단지 여름의 더위를 피해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거나 곁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여행담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면 싶은 것도 세상을 향한 더 나은 성찰에 이르는 체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든지 기존의 의식은 잠시 비워 두었으면 싶은, 눈앞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삶의 방식을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 대해 이해하는 기회이기를 바랐다.(13쪽)
인간은 풍경으로 존재하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 풍경은 단순한 자연물이나 형식적 배경이 아닌 감각이나 체험 공유를 통한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복합체였다. 어릴 적 같이 놀던 동무들이나 마을의 어른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풍경들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를 키워 준 고향의 햇빛과 바람은 갈 적마다 낯설기만 한데, 알게 모르게 나를 키워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도 새롭게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가끔이라도 찾아오는 고향이 크게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참 고마운 것이리라. 마을이나 도시, 국가를 불문하고 풍경에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다. 풍경 속에서 많은 시간을 뛰어놀았기에 공간에서 장소로 친화된 산과 물, 들, 그리고 길은 그리움의 원천이었다.(61쪽~62쪽)
명부전 앞의 청벚도 왕벚도 이미 떠나고 없다. 때가 되면 그렇듯 떠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아까시꽃이 피고 찔레꽃이 피면 봄은 간다는 인사도 없이 떠날 것이다. 길이 아쉬워 산길로 접어든다.
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어 한적한 길이다. 산신각 앞에 이르니 댓돌 위에 흰 고무신 한 켤레가 반듯하게 놓여 있다. 흰 고무신을 신고 이곳에 오른 여인은 누구일까? 나직이 안을 들여다보니 한 여인이 절을 올리고 있다. 몸을 던지듯 엎드린 채 손을 펴 드는 여인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무슨 간곡한 사연이 있는 것일까? 갑자기 궁금해져 묻고 싶어지는 걸 참고 다시 산길에 오른다.(69쪽)
여행은 그러한 타인들에게서 벗어나고 달아나는 절호의 기회이다. 갈등과 욕망에 치여 저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불러낼 수, 생에서 너무나 짧게 주어지는 고통스럽고 귀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다. 여행길에서도 동행을 구하고 타인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많은 이들은 술을 부른다. 민낯의 자신과 대면한다는 것이 낯설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행이 다섯, 너무나 단출했지만 또 다른 구속감은 피할 수가 없었다.(중략)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풍광을 만나는 것은 여행의 백미(白眉)이다. 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훔쳐보기도 하듯이. 스치듯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눈빛을 나누고 작은 먹을거리도 나누었다. 거대한 협곡으로 난 길을 오르고 내리며 대자연을 찬미하고 그 길을 지날 수 있었음에 대지의 정령에게 영광을 돌렸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 여인이 그 길을 가기 위하여 떠난다는, 이를테면 현지답사인 이유도 배낭에 담겨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뒤로 늦춰졌던 시간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113쪽)
칠월의 더위는 또 다른 시련이 되었음을 체감하면서 문득 생각났던 시가 한하운의 <전라도 가는 길>이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로 시작하는. 하늘이 벌을 내린 듯, 인간의 심경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웠을 무서운 벌을 받은 이가 스스로 유배를 떠나듯 자신이 소록도로 가는 모습을 무심하게 그려냈던 것일까?
신을 벗으면 발가락 한 개가 또 없어졌다는 시 구절을 되뇌면서 남도로 가는 먼 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주저했던 알량했던 내 속이 얼얼해져야 했다.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돌아올 수 없듯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거라지만 인생이기에 지나왔던 흔적을 더듬고 싶은 게 아닐런가?
이제 오래된 이야기처럼 88올림픽의 성화가 달려오던 길목, 사철 푸른 바다와 짙은 초록의 산과 들, 그와 동색인 제복으로 3년여를 보냈던 곳 완도였다, 물설고 말도 설어 울면서 왔다가, 푸른 바다와 한겨울에 더 푸른 보리밭, 그리고 사철 푸른 나무들에 푸른 제복으로 삼 년을 살다 보니 미운 정에 고운 정 들어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며 떠났던 곳이었으니 그랬다.(133쪽)
페루의 수도 리마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직항 노선이 없으니 L.A를 경유하는 게 최단 코스인데 환승 대기 시간까지 포함하면 꼬박 30시간을 갇힌 듯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고 쿠스코를 떠나 바닷길이 가까운 리마에 식민지 거점 도시를 건설했다. 강이 있었기에 사막에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다는데 외곽에서 본 풍경은 삭막했다. 부자와 빈자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것이지만 중심가와 외곽으로 그 구분이 확연해서 당황스러웠다. 이튿날 아침 사막에 주거지를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며 남태평양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가 휴게소에 1번 들린 후 4시간 만에 파라카스에 도착한다. 파라카스는 물개섬으로 알려진 바예스타 제도로 가는 배(쾌속선)를 타기 위한 작은 항구이다. ‘모래 폭풍’이라는 뜻의 파라까스는 정오가 되면 모래를 가득 품은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파라까스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해안을 조금 벗어나면 나스카 문양과 비슷한 이 지역의 상징 ‘칸 델라브로, 촛대지상화’를 볼 수 있다. 모래 언덕에 새겨진 폭 70m, 길이 189m, 깊이 1m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이다. (2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