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이완’은 나태와 게으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이완’을 느끼기 위해 미치도록 열심히 일하지만 ‘이완’의 시간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더 큰 ‘긴장’을 넘기고 나면 그 뒤에 더 큰 ‘이완’이 따라올 거라고 믿지만 쉽지 않다. 쉬고 싶다는 욕구를 채워도 우리는 다시 ‘이완’의 욕망에 사로잡힌다.
목적 합리성 과정에서 우리는 ‘가치’를 쉽게 얻고 ‘의미’를 버렸다. 그렇게 의미는 과거의 시간이 우리 전체의 시간임을 잊어버리고 상실할 때 잊게 된다.
누구는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고 누구는 과거에 뒤처져 사는 실패자가 아니라 모두 과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럴 때 사색의 삶은 ‘의미’를 만들고 ‘가치’를 놓치지 않게 한다. 그 가운데 우리는 오늘 퇴근하는 우리 스스로에게 진정한 위로를 전할 수 있게 된다. (p.16-20)
최근 취업 전선에서 밀려난 실직자들을 사회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은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이다. 실직한 어떤 지인 하나는 집 안에 있을 때는 모르겠는데 밖으로만 나오면 우울하다고 토로한다. 그 이유는 밖에 나오면 이것저것 살 것이 즐비한데, 아무것도 사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p.25)
그러나 소위 ‘문명’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 서로를 이해하게 만들고 화합하며, 소통하게 만들었는가. 여기서 소녀와 소년이 소통하고 화합할 수 있게 되는 결정적 원인이 늑대소년이 문명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관심과 배려 속에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서로에 대해 가까워지는 과정도 도구적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문명’을 통해서가 아닌 서로 함께 뛰어노는 ‘놀이’ 속에서 이루어진다. (p.30-31)
이 의지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잘못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살면서 생각하는 의지는 내가 싫어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는 must나 should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의지는 want가 되어야 하며 그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나의 의지라 함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언인지 정체도 모른 채 그것을 하다 보면 우리의 감정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그저 행하기 위해 잘못된 ‘의지’의 개념에 기대게 된다. 자신의 의지에 앞서 내면을 통한 정체성의 확인이 가장 먼저다. 하지만 도구적 이성과 목적 합리주의는 이것을 망각하게 하고 목적성에 의한 ‘의지’와 결심을 끊임없이 생성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생각 없이 자신의 ‘의지’만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p.37)
문맹자를 만들어 놓은 사회에서 문맹 퇴치보다는 문맹 자체가 주는 모욕감을 키우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회는 결국 한나를 죽게 만들었다. 한나가 그토록 자신에게 누군가 책을 읽어 주길 바랐던 이유는 책이 다른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공감’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을 다 깨우치고 난 후 그의 유일한 지인인 마이클마저 한나의 죄만 놓고 성토하려 할 때, 한나는 더 이상 글 또는 책이 주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p.66)
명제는 인식적 가치(epistemic value)에 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참(ture)과 거짓(false)으로 논해지지만 영화 〈용의자X〉에서 보여 준 것처럼 죽을 때까지 참과 거짓을 증명하지 못하는 게 우리 인생의 다반사이다. 특히 과학을 통한 실증주의가 가장 신뢰받는 현대에서 우리는 수치화되고 과학화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과학과 숫자는 오히려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우리의 존재적 이유까지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다. (p.80)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던졌던가? 자신을 던졌던 적은 있는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라는 보호막을 입고 그 언어로 그들과 소통하려 하지는 않았는가.
어차피 소통이라는 것은 나의 언어로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언어에 내가 들어가고 그가 내 언어로 들어올 때만이 이루어진다. (p.87)
시간이 공간을 통한 물리적 개념이 아닌 ‘사건’의 ‘강도’에 따른 기억의 흐름이라면 호피 인디언처럼 우리도 강도에 따라 사고할 수 있다. 여기서 강도(intensity)는 물리적 개념의 강/약 (strength)이 아니라 시간의 개념을 품은 감정의 ‘지속성’이다. 지속성이 긴 사건과 그렇지 않은 사건으로 구분 지음으로써 우리는 시간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p.88-89)
우리가 그토록 확신하는 인과관계는 어쩌면 우리 안에서 외양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중력의 법칙이 마치 모든 것들에 적용되는 것처럼 믿었지만 고작 ‘지구’ 안에서일 뿐이다. 지속적인 현대 과학의 ‘생명 연장의 꿈’은 좋고 나쁨을 떠나 어쩌면 의학 기술의 발전이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의 결과일 수도 있다. 지구 반대편의 아프리카 지역과 관련된 질병 연구보다는 부유한 나라의 지역과 관련된 질병 연구가 훨씬 더 확대되어 가고 있으니 말이다. (p.91-92)
그냥 믿어 버린 실체 없는 실체들은 더 많은 ‘상상’들을 자아내며, 잘못된 신념을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결국 의심 없고 역동적이지 않는 믿음들은 ‘실체 없는’ 정체성들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마치 그것이 나의 정체성인 양 믿으며 내가 이 선생이 되어 살아가거나 그러한 정체성들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 버린다. 어느 학자는 믿음은 믿음 자체에 대한 의심이 포함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의심이 믿음의 역동성을 만들어 내며, 더 나아가 신념을 형성하게 만든다. 신념을 가지게 되면 믿음은 지속적으로 신념과 비교하면서 더 큰 역동성을 만들어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선다. (p.130-131)
여기서 침묵이 필요한 이유는 침묵 없이 진행되는 진리는 말에 의해 그 진리가 개개의 영역으로 머물게 되며, 다양한 연계성을 이어 갈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한 영역의 지속적인 말은 진리는 감추고, 다른 영역들의 말들과 어울림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p.149)
하나의 작은 물음들은 그 물음의 실체를 바라보는 자신의 믿음 없이, 지나치는 ‘현상’에만 몰두한 나머지 우리의 관심들은 결론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휘발되어 눈앞에서 사라진다.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믿음 없는 자신의 불안감을 잊기 위해 부유하여 떠다니는 실체 없는 존재들의 물음에 기대어 살아가려 한다.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