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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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문을 열면 한강을 척추로 서울의 남과 북이 한눈에 보였다. 지척에 있는 듯 눈앞에 한강과 여의도가 보였다. 빼어난 몸매를 자랑하는 63빌딩도, 여의도의 느낌표마냥 우뚝 솟아있는 쌍둥이 빌딩도 보였다. 고독하지만 꿋꿋하게 물의 흐름을 버티는 밤섬의 생명력이 고동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홀로 버티고 있는 섬의 생명력은 서강대교의 인위적인 콘크리트 길목을 여지없이 잘라버릴 만큼 강했다. 섬은 그처럼 의연하게 숨 쉬고 있었다. 그 양옆을 호위하듯 강변대로와 올림픽대로의 긴 차량행렬이 보였다. 실로 그 전망은 광활했다.
작은 집에서는 아무런 방해 없이 이 모든 것을 우리의 눈 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뜨거운 심장 속에 담을 수 있었다. 물론 집이 작기 때문에 비로소 느껴지는 극적인 대조의 쾌감일지도 몰랐다. 목구멍을 조일 듯한 밀폐된 공간에서 간신히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온몸으로 호흡할 때 다가오는 청량감,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세 평 남짓한 방안으로 다시 들어오면 우리는 어느새 어느 넓은 집보다 더 큰 집을 소유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집이 학교 바로 뒤편에 기둥을 박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산 중턱에 위치한 학교후문으로 돌아나가면 산으로 오르는 엉성한 샛길이 하나 있었다. 똬리 튼 뱀이 막 몸뚱이를 펴려할 때처럼 샛길은 산의 정상으로 구불구불 연이어져 있었다. 그 길을 타고 한 십 분가량 올라가면 우리의 쉼터가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쉼터가 있는 체하는 자들의 거창한 별장처럼 번듯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곳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쪼들린 사람들의 풋풋한 삶의 터전 속에 존재했다. 우리의 작은 집에 붙어있는 가난이라는 문패가 그들의 작은 집 대문 기둥에도 예외 없이 붙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작은 집을 과감히 ‘산장’이라 불렀다.
이곳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곳에 시시때때로 염치없이 더부살이하는, 가난한 시대의 정에 굶주린, 젊고 평범한 학생일 뿐이었다. 사실 정으로만 본다면 작은 집의 정말 주인을 따라 갈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으리라. 그리고 이런 생각은 나만이 아닌 작은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했다.
그는 형이기도 하면서 학교선배이기도 했다. 형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이 시대 젊은이 중 하나라는 사실만은 그가 풍기는 외모에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그런 형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형의 과거가 아니라 형이 이토록 멋들어진 쉼터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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