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닥친 분노는 주로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라기보다 오래 묵은 적대감과 증오심 같은 것들이었다. 불법을 바로잡으려는 공무원과 그 ‘시정’으로 인해 자기 삶이 흔들린다고 믿는 이들. 하지만 만남이 그렇듯 사람마다 결이 있고, 또 극악할 것 같은 상황에서의 어떤 만남은 묘하게도 유순하게 흘러가곤 한다.
별것도 아닌 일로 직원을 쥐 잡듯 괴롭히는 민원인이 어느 날 나의 대수롭지 않은 행동으로 유순해지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사람마다 맞는 사람이 있는 것일까. 나는 천생연분까지는 아니더라도 악연이 시작되는 곳에서 좋은 인연의 씨앗이 뿌려지는 경험을 꽤 했다. (46-47쪽)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작은 키의 여성이 딸과 함께 사무실에 찾아왔다.
“며칠 전 밤 너무 죄송했어요. 공무원인지 아닌지 의심해서요.”
그녀는 아현동 그 집은 57년 전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 했다. 여력이 있었으면 고치든지 재개발 때 다시 짓든지 했을 텐데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고.
굳이 캐어묻진 못했지만 알 만한 사연이다. 우리네 부모님의 이야기.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그 집에서 낳아 길렀고, 그녀와 함께 자란 남매들에겐 그 다랑이처럼 쌓인 위태로운 계단이 하나의 우주이자 놀이터였을 것이다. 그녀는 성인이 되어 집을 떠났을 것이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그 집의 슬레이트를 얹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담벼락에서 민들레를 살피던 어머니도 가셨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 집은 포근한 동글 속 놀이터였고, 가족과의 사연을 구들장 바닥에 촘촘히 박아 넣던 유년기 전체였겠지.
생활이 어렵다는 말을 반복하며 연신 도와 달라는 그녀의 요청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여북하면 그러시겠습니까? 아믄요!” (164쪽)
33℃의 폭염에 달구어진 도로가 신발 밑창을 악어처럼 집어삼키던 오후였다. 강제집행을 위해 여직원 3명과 트럭 5대가 동원되었다. 다행히 집행 과정에서 불상사는 없었다. 언론에 홍대 조폭들의 기사가 보도된 지 2달 만이었고, 홍대에 불법 노점이 들어선 지 20년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술을 즐기지 않지만, 이날만큼은 나도 시원한 맥주에 땀을 식히며 긴장했던 마음을 눅이고 싶었다.
강제집행 이후 거리는 넓어졌고 깔끔해진 홍대 거리는 젊은이와 예술인들의 낭만의 골목으로 변모해 갔다. 강남과 명동을 핫 플레이스로 즐기던 이들도 점차 홍대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리도 상권도 살아났다.
현장의 일을 하다 보면 때로 너무나 오랜 세월 방치되고 곪아 터진, 그야말로 층층이 쌓인 ‘적폐’가 구조적으로 고착된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가끔은 우리 사회의 부패 사슬이 저 위의 권력에서 밑바닥까지 얽혀 거대한 비위의 적층을 가진 피라미드로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피라미드 밑바닥일수록 사람들은 더 큰 압력을 받고, 먹이사슬로 엮인 이들의 아귀다툼은 더 치열한 것이 아닐까. (179-180쪽)
세 번째는 팬데믹 기간, 장기 휴지기를 활용해 상암동주민센터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것이다. 사무용 집기 등 쌓아 놓은 물건이 고물상 같았던 주민센터 옥상에 녹지를 조성하고 주민과 직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러브하우스를 꾸몄다. 시기도 적절했다. 다른 곳에서 코로나로 인해 사업을 못 하니 예산을 따오기도 한결 수월했다. 총예산 2천만 원가량이 들어갔지만, 찔끔찔끔 두어 번 하는 것보다 한 번에 제대로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
기업과 마찬가지로 공무원의 업무도 누가 맡느냐에 따라 성취 정도는 크게 차이 난다. 전임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을 때 난 곳간을 연상한다. 적어도 1년 넘게 그 일을 했다면 곳간은 각종 곡식으로 잘 정돈되어야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곳간 열쇠와 장부를 받아서 곳간 문을 열면 두터운 먼지 가득한 공간에 양곡이 썩어 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때도 있다. 장부와 품목은 맞지 않고, 먹을 수 없는 음식도 양호한 곡식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즉 세계관에서 이 모든 것들이 차이 난다고 생각한다. 팬데믹 시절엔 이러한 차이가 더욱 잘 보였다.
Just do it. 그냥 하라고 했다. 몸을 먼저 들이밀고. (253쪽)